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3)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3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영미권에 잘 알려진 <세 나무 이야기>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책에는 올리브나무와 떡갈나무, 소나무의 원대한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올리브나무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상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싣고 바다를 건널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던 소나무의 꿈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섭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나무의 꿈은 모두 좌절되고 맙니다. 올리브 나무는 보석상자 대신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고, 떡갈나무는 왕을 태우는 배 대신 조그만 낚싯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나무는 번개에 맞아 쓰레기더미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 나무는 자신의 꿈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들을 향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계실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이시게 되었습니다. 그 말구유는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큰 배 대신 작고 초라한 낚싯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낚싯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소나무를 찾아 두 쪽으로 쪼개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버려진 소나무로 만든 십자가였습니다. 그리하여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꿈과 소망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올 한 해 내게 이런저런 일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다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꿈과 소망이 좌절된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기도하시고 한 해를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내용상 같은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는 곧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분되어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 나라입니다. 마귀는 공중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 땅 가운데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되었는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일을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고 그 뜻이 어느 시점엔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들은 그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우리의 기도나 전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또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여기에 담긴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이고,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을 이루시는데 우리의 기도가 일부가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기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이제 막 시작된 교회에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된 일이 생긴 겁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교회공동체는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 신이요”(행 4:20).
여기 보면 ‘대주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들이 무엇이라고 기도하는가?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9-30).
박해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사도들과 교회공동체는 그 일이 자신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어떤 일이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과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객관적으로는 볼 때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볼 때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죠?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분명하게 세워졌음에도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여러 기도 형태 중에 말씀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나가면서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개인과 세상을 향한 완전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성경 66권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주 간단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귀의 지배가 꺾어지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불의와 고통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들입니다. 이것이 아직 실제가 되지 않은 영역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김양재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100프로 응답 받는 기도>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과장된 이야기가 아닌가요? 정말 우리의 기도가 100% 응답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그렇습니다. 시간상의 문제일 뿐 하나님의 뜻은 결국 100%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라는 백지수표를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 기도나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조건을 붙이셨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이 있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고 주기도문에 요약된 하나님의 뜻이 바깥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주의 뜻이 이루어지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 때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물론이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있다면 그래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기도하실 수 있겠습니까?
김영봉 목사님이라는 분이 주기도문을 ‘가장 위험한 기도’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분이 쓰신 책 제목이 그래요.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왜 위험한가? 이 기도를 진실하게 드린다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는 옛 사람이 죽어야 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에는 다양한 뜻이 담겨있지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기 뜻을 부인하는 겁니다. 자기 뜻을 부인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르는 일도, 자기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만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예수님의 솔직한 마음과 뜻이 담긴 기도였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잔을 옮겨주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기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참으로 위대한 기도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간절하게, 강권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서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 뜻을 부인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 당하기 위한 기도였어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셨지만 그 뜻을 이루려고 기도를 시작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그 마음을 꺾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결국 이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위대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렇게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겁니다.
육신의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뜻과 계획을 꺾는다는 것은 죽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의 자리가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기도를 통하여 자기를 부인할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요? 자아가 죽어지는 자리입니다. 자기 계획과 뜻이 죽어지는 자리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아래 두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되는 능력의 자리입니다.
탁월한 설교자였던 그레이엄 스크로지 박사가 영국의 케직 사경회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해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청중이 모두 떠나고 한 젊은 여대생이 혼자 앉아 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습니다. 스크로지 박사가 그에게 다가가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크로지 박사님, 박사님의 메시지는 너무나 강력했지만 저는 그리스도를 정말 나의 주로 모시기가 두려워요. 그분이 제게 무엇을 요구하실지 두려워요!”
스크로지 박사는 성경에서 욥바에 머물렀던 베드로의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이나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여기는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를 내려 보내시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 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주여’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둘 중 하나를 당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아요. 성경과 펜을 여기 두고 다른 방에 들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주여’나 ‘그럴 수 없나이다’ 둘 중 한쪽을 택해 지우도록 하십시오.”
스크로지 박사는 그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강당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깨너머로 살펴보니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부분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말씀을 주기도 또는 주기도문이라 부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주기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다른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도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십니까? 그것이 진실한 고백이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도 주님이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주여,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나이다.”를 지우고 주님만 남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에 주님만 남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고 꿈꾸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우리이 기도와 삶을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말구유 같으나 가장 귀한 보배를 담은 인생으로, 낚싯배 같으나 가장 존귀한 왕을 모시고 가는 인생으로,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나무 같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비록 땅을 디디고 살지만 감히 하늘의 뜻을 이루는 인생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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