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보물, 시선, 그리고 주인(마태복음 6:19-24)
마음의 보물, 시선, 그리고 주인 마태복음 6:19-24
○ 마음의 보물, 시선, 주인 / 마태복음 6:19-2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래 전에 어떤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어린 소년이 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발부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이 떨어져 있었다. 소년은 급히 그것을 주웠다. 가슴이 떨리며 자랑스런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내거야!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그 뒤로 그 소년은 어디를 가든 머리를 숙이고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물을 찾게 되었다. 소년은 평생 동안 262개의 1페니 동전과 47개의 5센트 동전 그리고 2개의 50센트 은화 그리고 똘똘 뭉친 한 장의 1달러 지폐 등 합계 3달러 26센트를 땅에서 주었다. 그가 그런 돈을 공짜로 손에 넣은 것일까? 그는 39회의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저녁노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17회의 무지개, 몇 백 몇 천의 단풍잎이 가을 서리에 붉게 물드는 것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구름이 몇 천 가지 형태로 바뀌는 것을, 태양이 빛나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는 기쁨을 버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많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정적인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면 마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보물입니다. 보물이 뭐죠?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거죠. 두 번째는 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적인 눈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눈을 말해요. 세 번째는 주인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두 번째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가?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 이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보물의 문제와, 시선의 문제, 주인의 문제, 세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사실 다 같은 것을 의미해요.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고, 결국 우리가 바라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똑 같이 가치 있게 생각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똑 같이 바라보고 살 수 없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법칙이 있다는 겁니다.
좀 전에 잡지에 실린 글을 읽어드렸습니다. 왜 소년이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 아름다운 자연세계를 보지 못했을까요? 땅에 떨어져 있는 보물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주기도문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두 말할 것도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죠. 주기도문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고 그렇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우리 마음 안에서 뒤바뀔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이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일반적으로는 죄라고 부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우상 숭배라고 부릅니다. 죄란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겨버린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것을 사랑한 나머지 주인으로 삼고 사는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 들어와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도 될 수 있고 가족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능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미래를 위하여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적용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족을 사랑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보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 그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가치가 뒤바꾸어지고, 시선이 빗나가고, 주인이 뒤바뀌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C. S. 루이스는 우리의 삶에 좋은 것을 최고의 것으로 떠받들 때 벌어지는 일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개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여자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유용성과 존엄성을 잃을 뿐 아니라 개를 소유하는 온당한 즐거움마저 잃는다. 큰 선보다 작은 선을, 전체적인 선보다 부분적인 선을 선택할 때마다 작은 선이나 부분적인 선은 상실된다. 그것을 얻고자 희생했음에도 말이다. 부수적인 것을 첫 자리에 두어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부수적인 것을 얻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한다.
돈이나 성공이나 가족은 좋은 거죠. 그러나 우리의 삶이 첫 자리를 차지게 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과 축복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 중에 톰 브래디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슈퍼볼 우승 반지를 세 번이나 탔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한 방송에서 불행한 얼굴로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슈퍼볼 우승 반지를 세 번이나 탔는데도 아직도 더 큰 무엇이 있을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봐, 그 정도면 됐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제 목표와 꿈과 인생을 이루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이건 아니다.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기자가 물었습니다. “해답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렇데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걸 알면 좋겠어요.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톰 브래디라는 선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과 성공과 명예. 사람들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족은 없었어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돈과 성공이라는 보물을 쌓고 또 쌓습니다. 그런데 왜 만족이 없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보물을 쌓는 곳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녹슬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녹슬고 부패하고 결국은 없어진다는 것은 우리 육체만 보아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겉 사람을 두고 날로 낡아진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녹슬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빼앗아 가려는 도둑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도둑은 실제로 도둑이나 사기꾼일 수도 있지만 질병이나 죽음, 고난과 실패라는 도둑일 수도 있습니다.
녹슬어 사라지거나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불안한 거죠. 사람들은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이 쌓으려고 하지만 녹이 사라지고 도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불안도 줄어들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불안이 사라지지 않으니 만족과 행복이 존재할 리도 없는 것이고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7개의 침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각각의 침실은 금고처럼 잠글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 다른 침실에서 잠을 잤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왜 침실을 옮겨 다니며 잠을 청해야 했겠습니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자객과 죽음이라는 도둑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가진 것을 한 순간에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후로 6장 마지막 부분까지 염려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염려는 불안의 한 종류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가 염려하는 거죠?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는 녹슬어 없어지고 도둑이 우글거리는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거기에 보물을 쌓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누구나 다 불안과 염려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그런데 염려를 안 하려고 해서 안 할 수 있다면 누가 염려하며 살겠습니까? 무엇이가를 쌓고 더 쌓는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불안과 염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처음에 말씀드렸던 세 가지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보물, 둘째는 시선, 셋째는 주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주인으로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의 아들인 브램웰 부스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구주의 발밑입니다. 거기서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발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돈이나 성공이나 사람을 높이 올려놓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발밑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고 살았던 어떤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제게 성공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을 따라 저도 성공을 갈망하며 살았지만 제 능력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도박으로 인한 재산 탕진과 잇따른 사업 실패로 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의 관심은 자녀에게로 향했습니다. 자녀를 성공시키기 위해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큰 딸에게 검정고시를 치르게 한 후 조기 유학을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큰 딸은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3개월 만에 통과하며 제 꿈을 이뤄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딸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해 건선피부염과 쇼크성 난독증을 앓게 되었고, 우울증과 대인기피증까지 얻어 집에서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딸은 모든 분노를 저에게 쏟아 냈고, 저는 제 인생이 해석되지 않아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내리막을 걷고 있을 때 주님께서 제 갈급한 영혼에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잘 못된 성공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자녀를 닦달해 왔는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제야 성공을 우상으로 삼고 살았던 제 죄가 깨달아졌습니다.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되었고, 딸은 저의 닦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의 삶이 달라진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되었고.” 성공이라는 우상을 주님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이 올려다보고 그 아래 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려다보면 다른 것들이 상대적으로 낮아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기게 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을 덜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요. 하나님 아버지의 발아래 들어가 주님을 섬기면 다른 것을 발아래 둘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돈과 성공이 목적이 되지 않고 수단이 되고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에이스 벤츄라>, <라이어 라이어>, <부르스 올마이티>, <에반 올마이티>, <패치 아담스>. 이런 영화 제목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모두 톰 새디악이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그는 만드는 영화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한편에 수백만 불을 받는 스타감옥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저택에서 고급 차를 여러 대 세워놓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몇 달씩 휴가를 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뇌진탕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는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세상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덫에 걸린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사실들을 깨달은 다음부터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집과 비행기와 자동차를 팔아서 구호단체에 기부하고 자신은 이동식 주택을 구입해서 거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영리영화사를 설립해서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요.
톰 새디악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에는 신앙적인 배경이 있었던 거죠. 그가 이런 결정을 할 무렵에 마음에서 일어났던 생각들을 <두려움과의 대화>라는 책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두려움: 미래는 생각 안 해? 병이라도 걸리면 어쩔 거야? 죽을 수도 있어!
진리: 다른 사람들은 이미 굶고 있고, 지금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이미 죽은 거야.
두려움: 다 줘버리면 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될 거야!
진리: 나는 내 자신으로 남을 거야. 늘 그래왔던 것처럼.
두려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배운 것과 정반대의 일만 하고 있어.
진리: 그래서 우리는 정반대의 감정인 행복과 만나게 됐잖아.
어떤 선교사님이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캐나다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선교훈련을 하며 생계를 위해서 농장에서 일을 하셨어요. 선교사로 헌신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각오했는데, 한 가지 정말 두려운 것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만은 피해보려고 하셨지만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을 발견하셨대요.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는 겁니다.
무엇인가 잃어버리면 죽을 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돈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죽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염려는 죄와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정말 우리가 염려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시선을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빼앗긴 채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고작 3달러 26센트를 줍기 위해 땅만 보고 다녔던 소년처럼, 땅에 있는 것을 추구하느라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사는 겁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풍랑이었지만 그 배는 안전했습니다. 그 배에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이 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다면 인생이라는 배는 어떤 풍랑 가운데서도 안전할 것입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는 주님께 완전히 내려놓으십니다. 주님 발아래 들어가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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