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태복음 6:9-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 6:9-13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느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썼다는 주기도문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독방에서 혼자만을 위한 영적인 삶을 산다면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매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거룩함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그날이 속히 임하도록 모든 노력을 쏟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뜻이...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지금 현재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부정하게 “뒷거래”를 한다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죄에 틈을 내어주고 있다면 나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주신 것들로 무장하지 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하나님께 합당한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와... 아버지께 ... 있사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권세와 ... 아버지께 ... 있사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영광만을 구한다면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나의 인생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매여 있다면 나는 “영원히”라고 말할 수 없다.
주기도문의 놀라움을 역설적으로 묘사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상당 기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기도문을 주로 기도 후에 또는 예배나 모임을 마친 후에 암송하는데 사용해 왔습니다. 주기도문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말 그대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암송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기도문은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 그대로 기도한다면 30초 정도면 끝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기에 나와 있는 문구 그대로 기도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해 드린 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시며 기도하시면 더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내 삶 가운데 하나의 이름을 찬양하고 높여 드릴 것인 무엇인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셔야 하는 영역은 어딘가? 이렇게 기도의 지경을 넓혀가다 보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30분, 한 시간, 그 이상도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깊이 있게 교제하고 그러므로 깊이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거죠. 그러나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에 관하여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기도는 송영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이 부분이 괄호로 표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본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래된 사본에는 이 내용이 없기 때문에 괄호로 넣은 것입니다. 성경 원본에는 이 내용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송영을 말씀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이 어떻게 우리가 가진 성경에 기록되게 되었는가?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린 후에 송영으로 기도를 마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찬양으로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간구가 드려진 후에 다시 찬양으로 마칩니다. 찬양이 기도의 내용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간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송영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깨달아졌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만드는 것이 송영이라는 거죠.
기도의 앞부분에 나오는 찬양은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어떻게 우리처럼 보잘 것 없는 피조물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뒷부분에 나오는 찬양은 우리가 앞에 나오는 모든 간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전에 주기도문을 암송하셨던 분들이 본문 말씀을 보면 단어 하나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대개’라는 단어입니다. 대체적으로라는 뜻인가? 아닙니다. 한자로 큰 대에 대개 개(덮을 개)인데 ‘큰 원칙으로 보건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이 너무 어려우니까 개역개정에서는 이 부분을 뺀 것 같습니다.
대개라는 것은 헬라어 ‘호티’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하자면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과 사죄의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하며, 모든 시험과 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이 되는 겁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고백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만 핵심은 이 진리를 믿는 겁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성전을 지을 준비를 마치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이런 찬양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1, 13).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누군가요? 자기 자신입니다.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막대한 재원과 재료를 준비한 사람이 누군가요? 그것도 자기 자신이죠. 그럼에도 다윗은 모든 주권과 권능과 영광이 주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하고 있음 봅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역대상 29장이 다윗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윗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으로 끝난다는 거죠.
청교도이자 유명한 저술가였던 리처드 백스터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가 쓴 책들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칭찬을 듣기가 불편했던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펜일 뿐이었습니다. 펜에게 무슨 칭찬을 돌립니까?”
리처드 백스터 역시 자신의 삶을 찬양으로 마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로마서에 11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표현만 약간 다르지 다윗과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로마서 11장은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다르게 말하면 복음의 원인과 결론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말씀인데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만물이 주께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의 주권자이시고 통치자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고 결국 그에게 모든 영광이 영원히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결론이고 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송영으로 끝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다윗처럼 하나님에 대한 송영으로 끝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무엇이든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솔로몬은 삶의 초기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만한 기도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와 삶의 마무리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은 특별한 데가 있었지만 유혹에도 약해서 큰 실패를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삼손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마지막 기도와 삶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삿 16:28).
시편은 총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의 상당수의 시편이 탄식 시로 분류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탄식하며 쓴 시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보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이 아주 솔직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망할 정도로 드러나 있어요.
필립 얀시가 쓴 책 중에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할 수 있느냐? 불경건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 단 한 번도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하나님을 믿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실망한 적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기대한 적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 감추지 않았습니다. 눈물과 탄식, 변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 응답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원망과 불평까지 감추지 않아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기도가 찬양으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인용하신 시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시인 거죠. 시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나이까 ”(시 22:1).
여기에 실망이라는 감정이 나타나 있나요? 물론입니다. 어떻게 보면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 녹아 있는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 28절).
시편 기자는 기도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 가운데 이런 반전이 가능했겠습니까?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땅 끝까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당하는 남선교회 회원들이 지방에 있는 산으로 등산을 가기로 했답니다. 목사님이 동행하지는 못하고 출발하기 전에 안전하게 다녀오시라고 기도를 해드렸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산에 갔다가 두 분이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한 분은 서울로 올라오셨지만 한 분은 좀 크게 다치셔서 현지 병원에 입원을 하셔야 했습니다. 함께 등산을 갔던 어떤 성도님이 찾아와서 목사가 ‘영발’이 없다고 따지더랍니다. 목사가 기도했는데 사고가 났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지지 않고 그렇게 대답하셨대요. “기도했기 때문에 안 죽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며칠 후에 병원에 입원하셨던 성도님의 아내가 헌금봉투를 가지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목사님께 보여드리고 헌금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봉투에는 이런 감사제목이 쓰여 있었습니다. “사고 가운데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믿는 건가요?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될 것을 믿는 것인가요? 우리의 삶이 안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가지신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그냥 믿는 겁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황제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무에 던져질 위기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로부터 신상에 절하라는 마지막 경고를 받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8).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모든 판단과 결과를 그분께 다 맡겼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믿어져야 우리의 기도에 반전이 가능해져요. 기도가 원망이나 불평으로 끝나지 않고 찬양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반전이 있어야 고통스러운 현실을 돌파해 낼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렸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체적인 폭력과 죽음에 내던져지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난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로마의 황제를 주라고 고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강력한 기도를 드렸지만 그들이 처해 있던 환경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그들의 기도는 그들을 세상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을 무섭게 박해하던 로마도 결국은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중에 제인 크로스비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6주쯤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실수로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평생을 흑암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삶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찬송가 384장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악과 고통과 불의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과 눈물이 있지만 그것이 인생의 결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것이 기도의 결론도 아닙니다. 역사의 결론은 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인생의 결론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기도의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크로스비 여사가 흑암의 고통 속에서도 만사형통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결론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가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씨가 쓴 시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아픔과 저항정신을 노래한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의 마지막 소절입니다.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봄, 즉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겠습니까? 빼앗긴 들에 이미 봄은 왔습니다. 이제 곧 완전한 봄이 올 것입니다. 봄을 가져오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서 봄을 빼앗기 위해 안간 힘을 쓸 것입니다.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고 속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십시다. 믿음과 기도와 찬양으로 저항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십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와 삶의 결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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