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부요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고린도후서 8:9)

우리의 부요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후서 8:9

○ 우리의 부요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고린도후서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버드대학의 교수였던 하비콕스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세기는 이데올로기로 갈등을 빚는 시대였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전 세계가 나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 21세기의 기준은 오직 ‘돈’, 즉 ‘경제’가 될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익이 생기면 과거의 적군도 우군이 되고 경제적인 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현재의 우군도 적군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21세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시장의 신’이 대결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즉, 바알 신앙은 인간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신앙입니다. 앞으로는 바알, 즉 물질을 놓고 경쟁하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바알, 하나님과 돈이 경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으로 많은 것이 설명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지고 구분되어 집니다. 비행기 좌석의 종류에는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가 있습니다. 각각 가격이 다르고 제공되는 서비스가 다릅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집에 사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이런 것들이 사람의 됨됨이를 설명해 주는 것인가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로 사람의 됨됨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런 것들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실제로는 이런 것들로 사람을 구별합니다. 심지어 차별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중에 명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똑 같은 기능을 하는데 가격 차이는 수십 배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은 그런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명품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명품이 물론 물건이 좋은 건 맞아요. 하지만 명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뿐일까. 아닙니다. 사실은 명품을 소유함으로서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은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부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삶의 환경으로부터 안정감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통계인데요.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 2%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객관적인 경제력과 주관적인 판단에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지만 자신에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 이재용 씨, 빌게이츠 이런 사람들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소문난 재벌에게 물었대요. “돈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조금만 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조금만 더”를 외치지만 그 ‘더’를 가지고 누려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도 “조금만 더”를 외칩니다.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근본적인 빈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을까. 결론은 그거에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 전제가 있습니다. 실상은 우리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이재용 씨, 빌게이츠, 워런버핏.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재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영적인 빈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진정한 부를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우리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홈리스’, ‘노숙자’라고 부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우리 역시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영적인 홈리스요 노숙자입니다.

왜 우리가 홈리스가 된 줄 아세요? 죄로 말미암아 복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하나님의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우리가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픈 이유, 돈을 벌고 또 벌어도 만족함이 없는 이유, 행복을 추구하고 또 추구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유. 사실은 다 이것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불렀던 그런 찬양 아실 거예요.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가사가 좀 유치한 것 같지만 정확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돈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영적인 빈곤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지만 결코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재벌도 결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나라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오셨다는 건가요?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우리 예수님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질의 축복도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깊은 문제, 영적인 빈곤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이셨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좋은 것,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소유하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 땅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냄새나는 짐승의 밥그릇에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난하게 사셨어요. 여러분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좋은 집에 살아보신 적이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홈리스 같은 삶을 사셨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좋은 차 타고 싶으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좋은 말 한 번 타보지 못하시고 겨우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요. 십자가는 가난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그린 성화같은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속옷을 입고 계십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그리기가 민망하니까 그렇게 그린 것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군인들이 속옷을 제비뽑아 가졌다고 했습니다.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거예요. 생명의 왕이신 분께서 벌거벗은 채 죽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것보다 가난한 죽음이 또 있습니까?

정교회에서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

옷을 입으신 것처럼 빛을 입으신 이가
벌거벗겨진 채 심판정에 세워지셨다
친히 지으신 사람들의 주먹이 그 뺨을 때렸다
불법의 무리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궁창에 이 땅을 매다신 이가
오늘 친히 나무에 달리셨다
천사들의 왕이신 이가 가시관을 쓰셨다
구름으로 하늘을 두르신 이가
자주색 옷을 그 몸에 두르고 조롱을 당하셨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했나요?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무엇인가를 삽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비싼 돈을 주고 불량품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속아서 살 수는 있지만 알고는 절대로 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량품인 것을 알고도 비싼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불량품을 최상의 명품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해 아주 비싼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 비싼 대가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인 거예요.

우리가 찾아야 할 생명, 어디 있나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집, 어디 있나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영광, 어디 있나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모든 복, 어디 있나요? 두 말할 것 없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안에 모든 부요함이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가난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부자인가요? 여러분 집에 있는 통장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 시세 계산하지 마세요. 진실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이유는 하나에요. 부요하신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하기를 좋아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혼하면 신랑에게 속한 모든 것이 신부의 것이 됩니다. 결혼하는 순간 신랑의 부요함이 곧 신부의 부요함이 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죽을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부요한 것 아닙니까? 저주 밖에는 받을 것이 없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면 부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 자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부요한 것 아닌가요? 영적인 홈리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다면 부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영원한 안전을 허락 받았다면 부요한 것 아닌가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예수를 만나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8세기 영국의 한 설교자 이야기인데요. 그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침대를 둘러싸고 고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고모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모가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 크게 말했습니다.
“정말 안됐어. 그녀의 삶은 정말 힘들었지. 남편 두 명과 사별했고, 병도 자주 앓았지. 게다가 결국 가난하게 죽었지 뭐야.”
그런데 갑자기 고모가 눈을 뜨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 나보고 가난하대? 나는 부자야, 부자! 그리고 나는 이제 곧 사자처럼 대담하게 주님 앞에 서게 될 거야!” 그러고 나서 고모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모를 불쌍하다, 가난하다고 했지만 고모는 자신을 부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고모의 삶의 환경만 보았지만 고모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함을 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상실을 말하는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비로소 돈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주어진 것에 자족하는 마음이 생기고, 감사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를 그토록 가난하고 굶주리게 만드는 영적인 빈곤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돈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이 사라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해지셨다는 것이 깨달아지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실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다윗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목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모든 부를 소유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실제가 된 사람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며칠 전에 수련회 준비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오늘부터 참여하는 그 수련회 준비 모임입니다. 거기서 한 권사님의 강의와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도전이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돈과 세상 성공을 따라가다 큰 실패를 경험하신 분이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예배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예전에도 가족을 사랑한다고 했고, 그래서도 돈도 벌었고, 뭐든지 잘 해주려고 애썼고, 그래서 가족에게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는데, ... 지금은 지옥 같던 가정이 천국 같은 가정으로 바뀌었습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집에 덩치 큰 다섯 식구가 자기 방 따로 없이 살아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아들딸아이들이 한 방에서 자고,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환경이 안 돼도, 습하고 벌레가 나오고, 비가 많이 오면 번번이 정전이 되고 하수구와 정화조가 넘쳐 물과 오물이 방으로 들어와도, 매일 찬송이 흐르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를 위해서 울며, 또 밤이 늦도록 웃음꽃을 피웁니다. ... 서로 돕고 존중하고 존경하고 힘을 합쳐서 어려운 이웃과 가정을 돕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과 또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주님을 완전히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울며 신음하는 가정들을 초대해서 만나고 또 함께 찾아가서 기도하고 섬깁니다. 우리 가정의 실패와 회복의 경험이 주님 안에 아름다운 은사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세워주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로 살고 있는 자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자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자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진정한 부자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안에 고백이 실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