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존감이신 예수 그리스도(고린도후서 5:17)
우리의 자존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후서 5:17
○ 우리의 자존감이신 예수 그리스도 /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얼마 전에 SNS에서 한 아나운서의 글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둔 딸로 소개했습니다.
...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 아래 잘 자란 아나운서 딸이다. 한글조차 익숙하지 않은 부모 아래 말을 업으로 하는 아나운서다. 내가 개천에서 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정직하게 노동하고 열심히 삶을 일궈낸 부모를 보고 배우며, 알게 모르게 체득된 삶에 대한 경이(驚異)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공사장을 향하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돈을 아끼고 쌀을 씻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매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나의 부모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가 입증하고 싶었고, 그들의 선명한 증거가 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것들에 몰두했다. ... 나를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도 부모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이 부족한 만큼 사랑을 채워 나를 돌봐주었고,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나를 대견해했고,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 나는 그것을 잘 알아 내 앞에 놓인 삶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여유가 없던 부모의 인생에 나는 목숨을 걸고 생을 바쳐 키워낸 딸이었다.
길거리를 걷다 공사 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나는 속으로 생각이 든다.
‘저분들에게도 번듯한 아들이, 잘 자란 딸들이 있겠지? 그 자식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했던 것처럼 부모를 감추었을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증명하고 싶다. 평생 막노동과 가사노동을 하며 키운 딸이 아나운서가 되어 그들의 삶을 말과 글로 옮긴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생도 인정받고 위로받길 바란다.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모두의 부모가 존중받길 바란다.
며칠 있으면 어버이 날입니다. 저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직업이나 가진 것과 상관없이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아나운서의 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반응이 감동이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밝히면서 부모님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낸 것은 귀하다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대하면서 좀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글에도 아나운서라는 단어가 몇 번 등장하고 그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막노동하시는 아버지가 존중 받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글에 보면 입증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모님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무엇으로 입증하려고 하는가? 아나운서라는 직업으로 입증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녀가 성공하지 못하면 부모의 삶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인가요?
여러분은 무엇으로 자신을 입증하려고 하십니까? 무엇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을 입증하려고 하시나요? 여러분이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몇 주 전부터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자존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복음과 무슨 상관인가? 아닙니다.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자존감이란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자존감은 비교적 어린 시설에 형성 된다고 합니다.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을 받으면 건강한 자존감을 갖겠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는 이유는 대개 부정적인 과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과거에 상처받은 경험, 예를 들면 신체적, 언어적, 정서적 학대를 받는 경우에 자존감이 낮아지게 되고요. 부모의 이혼처럼 아주 중요한 관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낮은 자존감은 부정적인 언어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개’로 시작되는 욕을 자주 들어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생각이 자주 드십니까?” “제가 진짜 개처럼 생각 됩니다.” “그래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제가 강아지 때부터요.”
우스갯소리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것은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 가정에서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한 번 들을 때 부정적인 말을 열 번 정도 듣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선생님에게 긍정적인 말을 한 번 들을 부정적인 말을 일곱 번 정도 듣는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말 한 번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는 네 번의 긍정적인 말이 필요한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개의 부모들은 비교하기, 평가하기 선수입니다. 존재 자체를 귀하에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적, 성과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비교하기 일쑤입니다. “너 몇 점 맞았어? 너 몇 등 했니?” “너는 왜 그거 밖에 못하냐? 옆집 누구누구를 보고 좀 배워라!”
이렇게 부정적인 경험과 메시지에 자주 노출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 되는 거예요.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문제들과 고통거리가 낮은 자존감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을 깎아 내립니다. 그런데 자신만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 하고 있는 것이나 장점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칭찬과 격려에 얼마나 인색하지 모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자신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책임을 모면하려고도 해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좋을 리가 없겠지요.
남편을 미워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살던 성도가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뭔가 모르는 분노가 늘 자리 잡고 있었고 가끔은 불안증과 심장의 고통까지 느꼈습니다.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신경성이라는 진단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수양회에 갔다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거절감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자를 기다리던 집에서 딸로 태어나면서 거절감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남자처럼 행동하고 남자를 이기기 위해 억척스럽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 그리고 여자라’는 이분법을 가지게 되었고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조차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 적대감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어쩌다 남편의 입에서 여자라는 말이 나오면 가정은 전쟁터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수양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여자 콤플렉스’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상처 받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게 정말 상처받을 만한 일이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상처 받기 쉬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자존감이 낮다는 말과 같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상처를 잘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잘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상처와 실패의 자리에서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자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기를 원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불행한 과거와 낮은 자존감에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연민과 피해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사랑받지 못했어!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야! 나는 불쌍해! 나는 못났어! 난 뭘 해도 안 돼!” 이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행한 과거와 부정적인 자존감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스러운 미래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 아십니까? 불신앙과 불순종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부정적인 자존감이 한 몫 했어요. 그들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안 된다”, “못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 앞에서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는데 그들의 생각은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과거에 묶여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만 있으면 뒷걸음질 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를 외쳤던 것입니다.
불행한 과거, 상처받은 과거라는 사슬을 끊어내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자존감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펙과 환경에서 나옵니다. 예전 어떤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요즘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한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 국회의원이야! 나를 건드려?” 이건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입니다.
어떤 사전에 보니까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해 놓았습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모두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며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패배할 경우 무한정 곤두박질친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경쟁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하면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습니다. 환경이나 경쟁 결과에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다가도 땅 속으로 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자존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 흔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려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의 삶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고통 받고 상처받은 기억들이 고스란히 삶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무시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 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전 것은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거예요. 상태가 조금 나아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존재라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에 관한 두 가지 진리를 보여줍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 하고 무능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고요. 또 한 가지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가치를 지닌 존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오. 우리가 털끝만큼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그 방법 밖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만나면 교만한 마음이 무너집니다. 경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존심도 무너져요. 사도 바울이 좋은 혈통과 가문, 좋은 학벌과 로마 시민권 같은 것을 왜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말한 줄 아세요? 쓸데없는 자존심을 유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데 방해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인가? “교만한 나는 죽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자존심은 죽었습니다.” 이런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자존심이 죽어야 자존감이 살아납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위한 가장 위대한 사랑의 헌신,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가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가치 있는 헌신, 그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을 바꾼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기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기준이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이전에는 죄인으로 바라보셨지만 이제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전에는 무가치한 사람으로 보셨지만 이제는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보세요. 이전에는 무능력한 자로 보셨지만 이제는 가능성 있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그것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성적이나 성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증거예요. 어떤 순간에도 우리의 격려자요 지지자가 되어 주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하찮은 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보아주시니, 우리 자신도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상처를 받았는데...” “내가 이런 평가를 받고 살아왔는데...” “내가 과거에 이렇게 실패했는데...”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못났는데...” 상처와 낮은 자존감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낮은 자존감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스토미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모진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유 없이 감금되기도 했고 저주가 섞인 말들을 밥 먹듯 듣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낮은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학교생활도, 직장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늘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우울증과 절망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남자를 만나 두 번이나 낙태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만나주셨고 그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 ... 인생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 있음을 발견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조각을 다시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음에 큰 슬픔과 좌절에 잠겨 있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한 구속자라고.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지, 또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하는 것은 그분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분이 모든 상처와 아픔, 고통들을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 더 소중한 것으로 바꾸신다고 하셨지요.”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상처에서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토록 상처를 주었던 어머니를 용서했어요. 뿐만 아니라 지금은 다른 사람을 위로고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술과 상담을 통해 상처받은 치유자로 살고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 깨어진 삶을 살아오셨나요?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삶을 내어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자존감의 근거를 찾고 계십니까? 쓸데없는 자존심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내 자존감이시다.” 이 정체성 하나가 분면하면 어떤 상처, 어떤 비난을 받았다 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처가 사명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