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30-31)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30-31
○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고린도전서 1:30-31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었던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일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죠. 그러나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고, 1865년 12월 18일 수정헌법이 시행됨으로 미국은 더 이상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모든 노예들이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적인 노예는 없었지만 여전히 백인 농장주를 섬기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노예입니까? 자유인입니까? 아니면 자유로운 노예입니까?
이와 똑 같은 상황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또는 때때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아니면 용서 받은 죄인인가요? 이런 혼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 진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죕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 안에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어요.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인간의 생명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를 지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 안에 죄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죄된 생명, 죄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도 잃어버리게 된 거예요.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전혀 딴 사람이 되도록 만듭니다. 죄가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는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고,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커녕 불행과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도 옳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부정적인 감정의 노예로 만듭니다. 죄가 있으면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생기는데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유리감옥입니다. 우리말에도 “죄 짓고 못 산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움과 불안, 수치심과 부끄러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우리가 능력이 없고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죄 때문입니다.
네레모라는 심리학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모든 심리적인 문제, 즉 불안, 불면증, 열등감, 우울증, 고독, 수심과 같은 문제에 어떤 형태로든 죄가 개입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요즘 연예인들이 성 관련 사건이나 마약 사건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뒤에서 저지른 죄가 온 세상에 드러나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런 것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이후에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자신이 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근본적으로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나뭇잎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부서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외면도 해보고, 이러저런 것들로 치장하고 가려도 보지만 부정적인 감정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죄 없앨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고 최고가 되고자 하지만 그런다고 열등감 없어지지 않습니다. 헛수고일 뿐입니다. 노력한다고 상처 받았다는 감정이 사라질까. 긍정의 힘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이길 수 있을까. 소용없는 일일 뿐입니다. 노력으로는 이런 것들로부터 구원받지 못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목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설교로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말라.” 설교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교회가 부흥되고, 이름이 나는데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찾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설교 못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죽습니다. 자기보다 설교 더 잘하는 사람 앞에 서면 열등감 때문에 못 견딥니다.
공부 잘 하는 것으로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말라. 잘 생기고 예쁜 외모로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말라. 성공적인 직장생활로 구원 받으려고 하지 말라. 돈으로 구원 받으려 하지 말라.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죄는 도덕적인 노력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나뭇잎으로 아무리 치장을 해봐야 죄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구원자가 필요한 거예요.
아담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옷을 지어 입혀 주셨는데요.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가죽 옷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만든 의의 옷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는 거예요.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의 의미를 기억하는 주간이지요. 십자가형은 당시에 극형에 해당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극한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로마 정부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고자 고안해 낸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곳에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아 극도의 수치심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극한의 고통과 수치를 당해야 하셨나요?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고,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우리는 분명히 불완전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지만, 이제는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우리 자신을 가린 채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나의 행위와 상태로 나를 평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와 상태로 나를 평가하시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전에 한 성도님과 세례문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속죄의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다고 믿는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은 믿음이 온전치 않지만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다시 설명해 드리고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님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겨주십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겨주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어겼는데, 어떻게 우리를 완전한 자로 여겨주실 수 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인 거예요.
“...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점수로 평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점수를 먹인다면 몇 점쯤 되겠습니까? 30점? 50점?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르는 겁니다. 우리 자신만 보면 사실은 0점이에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0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정이 달라져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몇 점쯤 될까? 60점? 70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100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100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 받고 죄에 대하여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주 말씀하시길 죄 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할렐루야!”
이것이 우리가 부를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거예요.
자신에 대하여 솔직한 사람이라면 자신 안에 죄와 관련된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죄된 욕망과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죄를 짓는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용서받은 죄인인가요? 이것이 우리가 겪는 혼란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아무런 죄도 짓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육체의 소욕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인들 향하여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는 죄가 아닌가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없는 것처럼 무시해도 되나요? 아닙니다. 죄는 죄입니다. 죄와 죄를 짓는 우리 자신을 정면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이 질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처음에 미국의 노예해방 이야기를 했습니다. 법적으로 노예해방이 선포되었지만 실제적으로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계속 노예로 살았을까요? “나는 노예가 아니다. 누구도 나를 노예로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노예생활을 끝내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 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 되는 거예요. 그 믿음이 실제가 된 사람만 농기구를 집어 던지고, 농장 문을 박차고 걸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결코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무기로 우리의 삶을 엉망진창으로는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는 있어요. 그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자꾸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사탄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넣어 줄 것입니다.
“네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네 행동을 봐! 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너도 알잖아. 그게 거룩이냐? 너는 죄인일 뿐이야. 너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냥 갈등하지 말고 죄인이라는 사실 받아들이고 편하게 살아라!”
이런 사탄의 참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속이는 자입니다. 사탄의 속임수를 거부하고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은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넘어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로운 자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재하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이 진리를 기억하고 붙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여기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런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지요? 예수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지요? “예수님이 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통하여 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처럼 살기 때문에 빛이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빛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살 수 있는 거예요. 주 안에서 자신을 빛으로 믿고 여기는 사람만 빛의 자녀들처럼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 삶을 돌아보건대 제 삶이 실제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산 자라는 의식이 분병하게 생겼을 때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지위를 결코 빼앗기기 않는다는 사실을 붙잡으면서 부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 넘어지셨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넘어지고 실패한 자리에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수치심과 열등감,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100점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베드로라 불러주셨습니다. 다혈질에 실수투성이인 그를 반석이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라 불린 이후에도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반석 같은 사도로 서게 되었습니다. 반석 같은 주님의 은혜가 그를 그렇게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하고 넘어지는 우리를 여전히 성도로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불러 주시니, 우리도 자신을 성도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마인드 콘트롤이 아닙니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결국 성도다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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