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태복음 3:17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마태복음 3:17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장영희 씨가 쓴 <내 인생에 단 한 번>이라는 책에 ‘가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 천 개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들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무엇 무엇 하는 척하는 것이 바로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죠. 만사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지요. 침착하고 당당한 멋쟁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지요.
그렇지만 내게 속지마세요.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감히 당신께 말할 수 있겠어요.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비웃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아마 죽고 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게 밝혀지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함의 가면을 쓰고 필사적인 게임을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떠는 작은 아이입니다. ... 나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게임이 싫습니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되고 싶습니다.
혹시 오늘 교회 오실 때도 가면 쓰고 오신 분이 있으신가요? 하나님 앞에서는 가면을 벗으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 안에 가장 강력한 욕구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나는 누구의 사랑도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허세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2008년 뉴욕에서 꽤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줄은 시내를 돌아돌아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7시간이 넘게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애플의 최신 제품을 사기 위한 줄일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포옹을 받기 위한 줄이었습니다. 포옹을 해주는 사람은 ‘암마’라고 불리는 54세의 힌두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2천 7백만 명을 안아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암마에게 안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지요?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 때문입니다. 단 30초 만이라도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에, 반대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괜찮은 사람인 척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멋지고 자신만만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못나고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고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 성취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 더 잘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면에서는 “더... 더... 더...” 자신을 몰아붙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지요. 불행한 사실은 성공과 최고를 지향하면서도 내면에 평화는 없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인정을 추구하면서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서서히 가면놀이, 인정받기 게임에 지쳐 가는 것이지요. 낮에는 생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왜 술과 도박, 쇼핑이나 게임 같은 것에 빠져드는지 아시나요? 마음이 공허하고 외롭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공간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인생이 왜 이렇게 피곤하고 고달픈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보라. 그러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면 진짜 자유와 행복이 주어질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진짜 사랑을 받아야 얻을 수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 그 진정한 사랑을 맛보고 누려야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랑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합니다. 멋있는 사람, 착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상처 나고 수치스럽고 형편없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에 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아십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모습을 아시고요. 부족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 거룩함에 얼마나 무능력한 자인지 알 알고 계세요.
우리는 인정받고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절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의 진짜 모습을 아시고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사랑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기뻐하셨는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씀일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똑 같이 해당되는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똑 같은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새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죠.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은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화되는 거예요. 존재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내가 세상에서 실수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실까?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나를 다시 받아주실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믿어져야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닐 앤더슨이이 쓴 책에 데릭이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청년은 늘 완벽을 요구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재능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잘 해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아들을 몰아붙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꿈을 성취해 냈습니다. 해군함대의 엘리트 비행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해군복무를 마칠 때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해군 복무를 마쳤을 때 저는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제 아버지처럼 완벽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대를 완전히 이루어드리는 일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단지 아버지를 위해서 해군사과학교에 간 것처럼 하나님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선교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그 후에 청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선교사가 되는 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게 청년은 전공을 바꾸어서 공부하다가 2년 후에 다시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기로 한 동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제는 의무감 때문에 선교사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완전하게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면 놀이하다가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사랑받는 자라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해 질 수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을 선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지요? 더 이상 부족함과 연약함을 감추고, 척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배우였던 오드리 햅번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승리는 있는 그대로 살 수 있게 된 것, 자신과 타인의 결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 승리가 뭔지 아십니까?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진실하고 겸손해질 수 있는 겁니다.
수지선한목자교회를 섬기시는 강대형 목사님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파이터>라는 책을 쓰셨는데, 상처 받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모님이 일곱 살 때 헤어지시고 어릴 때 어머니와 살다가 또 다른 집에서 살다가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사가 수치스러워서 늘 숨기곤 했습니다. 나중에 신학교에 가고, 전도사를 하고 목사가 되었을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가족치유 마음치유>라는 책을 읽던 중에 한 대목이 목사님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불완전한 가정이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의 부모나 불완전한 가정과 당신의 가치를 동일시하지 말라. 오직 당신의 가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들까지 내어줄 정도로 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당신의 가치이다. 당신의 가치를 당신의 불완전한 가정과 떼어 내라.”
그것은 수치심에 빠져 있던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깨달아졌습니다.
“네 가정과 네 정체성을 분리해라! ... 너는 예수의 피 값으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오직 네 정체성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을 선포해라!”
그 때 목사님의 가정환경과 목사님 자신을 떼어 냈습니다. 비로소 가정사에 대해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 진리를 붙잡게 되었을 때, 수치와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이 있었던 가정, 과거의 상처와 실패, 지금 처해 있는 어려운 환경. 모두 우리의 삶의 일부분입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도피일 뿐입니다.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경험을 우리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겁니다. 우리가 동일시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우리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안에서 발견되어질 필요가 있는 거예요.
천재로 불리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기대대로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그가 집필한 30여권의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성공과 성취로 장식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주위 사람 모두가 놀랄만한 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교수직을 포기합니다. 이제 장애인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고 하십니까?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헨리 나우엔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평생 동안 자기 안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경쟁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목소리는 그에게 성공하고 성취하라고 권했고, 또 다른 한 목소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위로 가운데 그저 단순히 거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은 동안 진정으로 이 두 번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정말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산 것은 그 10년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항상 성공하고 성취하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성공과 성취를 통하여 사랑과 인정을 받으라는 목소리가 들릴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더 이상 사랑과 인정을 구걸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흘러넘치도록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당히 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위로 가운데 거하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러면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받겠습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신다는 흔들림 없는 증표입니다. 성찬을 받으실 때 주님의 사랑에 눈이 뜨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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