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로 설명되는 사람들(빌립보서 3:7-9)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되는 사람들 빌립보서 3:7-9
○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되는 사람들 / 빌립보서 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동물의 세계에는 각인작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현상은 오리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오리는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다고 합니다. 만약에 개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태어난 오리 새끼는 개를 처음 보는 순간 개를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개를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한 오리는 개를 졸졸 따라 다니고, 위험한 순간이 오면 개 뒤에 숨기도 하고, 밤에는 개 옆에서 잠을 잡니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보이기라도 하면 개처럼 짖어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오리는 여전히 꽥꽥 짖어대고, 물을 즐기고, 날개를 퍼덕입니다. 때로는 오리처럼 행동하고 때로는 개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개처럼 해동하는 오리를 발견한다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스꽝스러운 오리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나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발견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이런 노력 때문에 예전에는 알지 못하고 감추어져 있던 사실이나 물질들이 발견되어지기도 하지요.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페니실린의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사람이 포도상구균 배양실험을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니실린이라는 항생 물질의 발견은 그 어떤 발견보다도 사람들의 생명을 많이 살린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 발견해야 할 것은 어떤 법칙이나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작 찾아야 할 것은 가장 가까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으신가요? 불행하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가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코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근거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인생을 방황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삶이 왜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의지가 없어서 그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장 학생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학생으로서의 의식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왜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려고 하는 것이지요? 학생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출신 배경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학력, 직업, 지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을 찾으려 한다는 거예요. 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다. 나는 어느 대학 출신이다. 나는 어떤 기업에 다닌다. 나는 1급 공무원이다. 나는 강남에 산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거죠.
요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인 것 같습니다. 스카이는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학교를 말하는 것이고요. 캐슬은 고급주택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나 스카이 캐슬이다.” 이러면 많은 것들이 설명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분당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남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성남시 분당구입니다. 그런데 유독 성남시민이 아니라 분당구민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분당이 경제적으로 부자동네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자동네에 산다. 그러므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이렇게 자신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는 거죠.
문제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들이고 얻었다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고위직 공무원이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 고위직 공무원이 아닐 때 나는 누구인가요? 성공한 직장인, 성공한 기업가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실패의 자리로 내려앉았을 때 나는 누구인가요? 무슨 캐슬에 산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캐슬에 살 수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요?
반대로 그런 위치에 오르고 싶고,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나는 누구입니까? 이름 없는 직장에 다니며 박봉으로 생활해야 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Who am I?”
우리가 이런 것들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어떤 때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어떤 때는 터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두 가지 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거예요.
어느 책에서 테니스 천재라고 불리던 제니퍼 캐프리아티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였고 그랜드슬램 우승 3회와 올림픽 금메달에 이르기까지, 테니스계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부상으로 결국 선수로서의 삶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에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약과 술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단돈 15달러짜리 반지를 훔치다가 걸려 체포되기도 했다고 해요. 결국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퇴원 후에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테니스를 그만두자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 후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어요. 내가 누구인지, 난 도대체 무엇인지..”
그녀의 문제는 테니스를 그만두었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진정한 문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테니스는 더 이상 그녀가 누구인지 설명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브라질 올림픽 때, 태권도 종목에 출천했던 이대훈 선수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명실상부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8강전에서 요르단 선수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대개 경기에서 패한 후에 선수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지요? 아쉬워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대훈 선수는 승리한 선수를 향해서 박수를 보내고,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대방 선수가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어요.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평생 갖고 살 것도 아닙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또 하나의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니퍼 캐프리아티와 이대훈 선수, 한 사람은 정상에 올랐고 한 사람은 경쟁에서 패했습니다. 단편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스포츠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누가 더 안정감 있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사도 바울은 좋은 혈통과 가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당시 최고의 학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당시 스카이 캐슬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어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은 그저 우리의 부족함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의 삶을 개선시켜 주시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헬퍼(Helper)가 아니라 그리스도,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 존재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거예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세요.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규정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무엇이 있지요?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 생명이 있고요. 예수님 안에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지혜와 능력이 있고요. 예수님 안에 새로운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새로운 성품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 행복이 있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토록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찾고 발견해야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느 대학을 졸업한 사람, 어떤 기업에 다는 사람이 나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금메달리스트가 나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반대로 못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사랑받지 못한 사람, 실패한 사람도 나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누구이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하고 존귀하며, 특별한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이 놀라운 정체성은 결코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영원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 관한 진리라고 믿으십니까? 이것이 정말 믿어지면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심리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소외감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고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아무리 어두운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성도님의 양육수료 간증이 기억에 남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저는, 한 친구가 저를 보고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 같다고 말할 만큼 슬픔과 근심에 눌려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잠들기 전이면, 내일 아침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삶이 허무하고 두려워 술에 취해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 제 삶과 내면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거의 매일 마시던 술을 완전히 끊게 되었고 늘 죽고 싶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밉기만 했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이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저에게 가장 귀한 보배가 되어주신 것과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을 알게 하심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양육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원이 무엇인지, 제가 믿는 믿음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세상 가운데 사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힘든 싸움이지만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음으로 인하여 힘을 얻습니다. 양육 교재의 제목이 ‘당신은 행복하십니까?’였는데 이 질문에 큰 소리로 답하고 싶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참 행복합니다!” 제 안에 구원과 생명과 기쁨이 되신 예수님께 모든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성도님의 삶이 달라진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정체성이시다. 나는 예수님으로, 예수님 안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관한 진리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해 보세요. 출신 배경, 직업, 지위,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스카이 캐슬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직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와 연합한 사람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설명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닌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채우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아닌 것들에서 만족과 기쁨을 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아닌 것들로 자신을 설명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만 채워지고, 예수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그분 안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참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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